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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챗구멍의 악마
11-11
글로리
주방 싱크대 수챗구멍에서 하얗고 말랑한 대가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생물의 머리라기 보다는, 잘린 비닐 조각이나, 불어터진 쌀알, 물에 젖은 골무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것이 물살에 쓸려 몇 센치쯤 움직인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생물임을 알 수 없고, 이내 한참을 물로 쓸어내려도 그것이 물살과 다른 방향으로 힘을 주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완전히 새하얗게 질렸다.
버, 버, 벌레일지도 몰라 …….
내가 모르는 어떤 애벌레 종. 긴 지렁이나 구더기 같은 것.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둥근 고무장갑의 끝 같은 대가리. 연가시는 본 적이 없지만 길고 꾸물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 사람한테도 막 기생하는 거 아니야? 악몽 같은 영화의 누누이 알려진 악명만을 익히 들었다. 조금 몸을 피했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것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낮고 허스키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외국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성우의 목소리였다. 중년 남자 쯤 되었을까. 꾸물거리던 것은 내가 머리를 쥐어 터트리기 이전에 모든 발성을 마쳤다. 진정하세요, 저는 이든 피츠제럴드입니다! 진정하세요, 레이디!
나는 움찔였다. 그야 세상 모든 소녀는, 아니지, 한국 같은 곳에서 자란 소녀라면 레이디 취급해주는 타성이 꽤 신선했기 때문에. 무심코 힘이 들어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눌러 버릴뻔한 것을 멈추고, 무척 조심스럽게, 그가 함부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빠져나가지 않도록 최소한의 힘만을 유지했다. 단언컨대 그가 버둥이는 게 보기 좋을 리 없었다.
어쩌면, 내가 환청을 듣고 있는 지도 모른다 … 그렇게 생각할 쯔음에, 그가 드디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손가락에 힘이 빠진 덕인지도 모르겠다. 아까보다는 좀 더 신사다운 목소리가 샌다.
진정합시다. 해칠 생각은 없어요. 자기 소개를 하죠, 우리.
나는 벌레와 말하길 망설였으나, 집에 혼자 있고 극도의 공포에 처하면 (그야 이렇게 긴 벌레가 싱크대 수챗구멍 밑에서 꿈틀댄다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법이다. 경계심이 가득한 티를 내며 그를 추궁했다. 지금 네가 말하고 있는 거야? 아님 나 미쳤나봐 …….
벌레는 꼼짝하지 않았다.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나를 겁에 질리게 한다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대신 그는 발성기관만으로 의사표현하기로 마음먹은 듯, 중년의 단정한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래요, 내가 말하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 나의 존재를 부인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삼엽충이 살던 시대부터 살았어요. 최근 백년 간은 아일랜드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내가 자리잡은 집의 아일랜드인이 영국인과 결혼했고, 또 그 영국인이 아이를 낳고, 중국인과 결혼해서, 또 그 중국인이 아이를 낳아 …….
한국 화장품이 싸다고는 들었어요. 오는 길에 스킨푸드라고 적힌 케어 제품을 봤습니다.
하나님ㅡ무교지만ㅡ 맙소사. 거짓말인지 허풍인지 모를 소리를 줄줄이 늘어놓는 벌레가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건, 과학 연구계의 새로운 지평을 넓힐 신 생명체, 또는, 또는 ……. 한국어는 어떻게 배운 거야, 아니지, 중국어도 알아들었겠네. 영국에서도 당연히 영어를 알아들었을 거고. 공룡이 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존재해온 것. 모든 언어를 아우르는 것.
ㅡ 너는 악마야?
기만의 성
10-15
글로리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언어를 잃어버렸다. 말문이 턱 막힌다. 그것은 이런 기분이다.
도서관에 입장한다. 책들은 아주 많이 꽂혀 있지만, 가끔은 홀로그램처럼, 시선을 돌릴 때에는 반투명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다시 한 번 그 쪽을 흘끔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여기에 있어, 하고 두터운 책등을 내보인다. 인쇄된 종이는 저마다 삐뚤빼뚤하게 제본되어 있어, 튀어나온 종이의 모서리를 쓰다듬어 본다. 오래되고 낡은 몇 장이 손에 집힌다. 책등을 읽으려 하면,
그러면 그것들은 너무 많이 소실되었다.
아주 많은 손상을 겪고, 긁히고, 잉크가 날아간, 금박이 벗겨진 글자가 나를 기다린다.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없다.
원래는 어떤 책이었을까.
무엇을 다루고 있을까.
안 쪽은 어떤 삶의 경험으로 채워져 있었을까.
용도를 알 수 없는 두터운 종이뭉치가 손 위로 쓰러진다.
상실 속에서 쓰러지고 싶다. 이 열람실의 모든 문을 잠그고, 훌쩍이며, 패치 형태로 기워진 이불을 덮어 바닥에 눕는다. 책을 베개 용도로 쓴다.
책이 젖어들어간다. 축축해진 글자가 배수구 위로 떨어진다. 하지만 슬퍼할 일도 없는 거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모르는데. 모르는 것에 대해 슬퍼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떨어진 글자들을 모두 그물 위로 건져 올려 빳빳하게 건조시킨다. 마릇하게 부서지는 것들을 전부 실에 끼워 잇는다. 완성될 글자의 모양을 모른다. 엉망진창인 퍼즐을 억지로 끼워 인을 박는다.
분수가 있다.
나를 마시세요.
망각의 샘처럼 잊게 해줄게요.
오른쪽에는 빗이 있다.
나를 빗어요.
까무룩 잠들게 해줄게.
쪽지가 놓여져 있다
아무 것도 믿지 마
온 몸의 체액이 투신을 원한다. 눈 밖으로, 코 밖으로, 입 밖으로, 턱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싶어. 도서관의 문을 잠근다. 비참을 피하기 위한 빗장을 건다. 내력 891년에 오오모리 왕자가 두고 간 것을 돌려주세요 그가 남긴 나룻배를 깎아 정을 세우고 당신의 신발을 포로 삼았습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의 환상이야.
문이 열린다.
기만의 성에서 손이 뻗어진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 기만을 하고 있다. 보기 좋게 굽어진 긴 속눈썹들이 날개깃처럼 내려앉는다.
작은 호두와 커다란 잣나무 관 중 원하는 하나를 고르세요.
기만의 성 사람들은 모두 기만을 하고 있다.
거짓을 택하면 죽는 거지.
그 무엇도 거짓이라고 할 수 없답니다.
가장 큰 우두머리가 나와 손짓한다. 거기에는 진심이 있으니까요.
도망칠 방법을 알고 싶으십니까.
그렇지만 당신은 도망친 뒤에 무슨 일이 벌어나는 지 모르는군요.
무슨 일이 벌어지지.
얼어붙은 밀밭 내내 금이 불타는 설원을 지나
당신은 지평선에 당도할 거야
그래, 사막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곳이에요
그 쯤 가면 우리가 몹시 그립겠죠
우리가 한 모든 것이 기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몰라
우리가 덮어주던 담요, 망토, 씌워준 모자, 장갑, 신발
모든 것이 그립겠지
그곳에서 우리를 그리워하겠지
후회하게 될 텐데 도망칠 이유가 있나요?
견딜 수 없을 때에 비행기 버튼을 누르는 것과 같아
R31에 기폭 장치가 달려 있거든
누르면 기체 밖으로 날아갈 수 있을 거야
뒤쪽에서 하늘거리는 것이 다가온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사람은 타인이 필요해요.
자, 우리와 함께 이불을 덮어요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죽는 순간 뿐이야
신께서 당신에게 선단을 허용치 않았잖아요
당신은 우리의 일부
우리의 끝단 우리의 중심
진리에 반하는 법을 알려줄게
계단을 오르라
기만의 왕이시여
그 관을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것
우리의 무리
우리의 일부
움직이는 우리
군체의 운명을 쓰자
그러면 한 명이라도 더
당신처럼 우는 이를 만나
작은 호두 커다란 잣나무 관을 골라
자아 잡아 먹이시고
구도자의 감각으로 사소서
마크 주커버그의 이벤트
10-02
글로리
마크 주커버그가 개최한 '전 지구 시민 중 랜덤 1인 골라 재산 절반 나눠주기' 이벤트에 당첨됐다. 당첨 메세지는 카카오톡으로 왔다. 안녕하세요, KakaoPay 입니다. 이번 마크 주커버그 주최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당첨금을 카카오페이로 수령하시겠어요? 나는 본인 인증도 하고 카카오 지갑 인증도 하고 휴대폰 인증도 거쳤다. 8.5pt로 한 무더기가 쓰여진 안내문 속에 카카오페이에서 수수료 몇 퍼센트를 뗄 것이고 어쩌고,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수수료의 3.5%를 떼더라도 마크 주커버그의 반절 재산을 원해. 나는 모든 절차를 마쳤고 입금을 기다리면 되었다. 입금은 목요일 오후 3시였다. 기쁜 마음으로 정신과에 갔다. 나는 두시 사십 오분 쯤 불리어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ㅡ 그래서요, 제가, 마크 주커버그의 이벤트에 당첨되어서요, 이따 세시에, 곧이네요. 네, 세시에 그의 재산 절반이 들어오거든요. 설마 그가 어떤 속임수나, 법적인 말장난을 써서 자신의 전 재산을 아주 적고 얕은 금액으로 잡아 속이지는 않았겠죠? 막 오만 육천원, 이런 거 들어오면 어떡해요? 아니겠죠? 네이버에 마크 주커버그 전재산을 쳐봐야겠어요. 아니다, 챗gpt한테 물어보고, 네이버에 교차검증 해 보죠. 전 있잖아요, 선생님, 아, 돈이 들어오면 뭘 하지 … 선생님 병원에도 투자를 좀 할까요? 기부일까요 병원에 돈을 내는 건?
거기까지 말하자 의사의 타자 속도가 빨라졌다. 그는 한창 으-음 … 하고 목을 긁는 곤란한 소리를 내며 타자를 치더니, 뒤늦게야 내 말에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크 주커버그가 이벤트를 열었다는 거죠.
네, 지난 토요일에요.
그리고 카카오 페이에서 안내 메세지가 왔고.
네, 보여드려요?
어, 보여주실 수 있어요? 보여주세요.
나는 당당히 휴대폰 메모장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카카오페이입니다, 라고 적혀진 포스트 옆에 안녕하세요 하버드 대학교입니다, 합격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라는 메세지도 적혀 있었다. 저것도 분명 지난 주에 내게 온 메세지가 맞다! 물론, 하버드에 입학하고 나면, 5년 뒤에 일어나는 우주 대 침공에서 내가 연구하는 양자 물리학이 너무나 큰 공신을 세우기 때문에, 자그마치 72시간을 인류를 위해 잠조차 자지 않고 연구해야 할 미래가 싫어서 입학을 거절했지만, 아무튼 저건 진짜였단 말이다!
의사 선생이, 아니 선생님이 한숨을 쉬었다. 씨발, 혹시 조종 당하고 있나? 그래, 때는 기원전 586년이었지. 프로메테우스 대 운하에서는 지구로 열 셋의 파견직을 내보냈어. 그들이 열 세 사도라고 불리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조종하였던가. 그들의 공적은 이렇다. 인간의 뇌에 침입해, 다른 인간을 얕잡아보고 불신하는 행위를 지속한다. 그럼 그 행동이 모든 공동체에 불신과 자낮을 전파한다. 인류는 그렇게 서서히, 몇 천년에 걸쳐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떡하지, 의사 선생님이 조종당하고 계신다면. 그렇지만 조종당하는 게 아니라 원래 저런 악인일 경우에는. 인류를 위해 나설 용기를 내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3분 정도, 나는 김헤일리 환자님, 나가보셔도 좋습니다, 라는 목소리에 일어섰다.
다른 환자들을 지켜야 해요.
네?
당신으로부터.
헤일리 환자님, 지금 기분이 많이 …
나는 살인은 피하자는 주의의 킬러입니다.
문 밖으로 나가 대기실에 소리쳤다. 꽤 품이 드는 일이었다. 모두 도망치세요! 이 의사는 여러분 모두를 비웃을 작정입니다. 그는 조종당하고 있어요. 간호사들, 어서! 그의 수족이 되기 싫다면 도망쳐야 해요. 여기서 월급을 얼마나 받았죠? 통장에 입금될 때, 세후 홀수 자리의 월급을 받게 되지 않던가요? 그게 나메크 성인들의 특징입니다!
천사천일천도일기
09-12
글로리
Y는 본인 인생에 책임감을 가졌다. 스무 살 초반부터 인생 계획표를 빼곡하게 채워 그렸고, 형광펜으로 색칠하고 꾸미기까지 했다. 난 있지, 반드시 스물 다섯에 결혼하고 허니문 베이비를 가질 거야. 서른 아홉엔 어디에서 일하고 ―
임신이란 것이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임신까지 철저한 일정 계획 속에 넣던 Y를 당시의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존경은 했다. 제 삶에 곳곳까지 도르래를 넣어 끌어 올리겠다는 저 태도. 살아있는 사람만이 가진 어떤 열의 같은 것.
몇 년이 흐르자 노후 대비, 노후 자금 계획 류의 컨설팅들이 유행했다. 진정 삶을 사랑한다면, 당신이 현명하고, 계획적인 사람이라면. 미래에 대비해두어야 한다, 흠 하나 비치지 않는 이론이었다.
반대로 안락사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여러가지 비난과 의심, 질타가 쏟아졌는데, 생의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거나, 너무 비극적인 결말이라거나, 아무튼 간에 낭만에 젖은 뼛소리들이 텅 텅 난간을 치며 뛰어내렸다. 나도 한순간에는 휩쓸렸다. 그래. 살고 싶다는 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인데. -주 여론적인 표현에 의하면- 삶의 긍정적인 사이드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선택이란 얼마나 안타까운가.
나는 유토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서 그의 말갛고 둥그란 눈을 마주보았다.
"유토, 원한다면 은행강도가 될 수도 있어. 알지?"
잡히면 그 자리에서 머리를 세게 찧고 죽어버리자. 예능 방송에서 번지 점프 같은 거 가끔 본 적 있지? 다들 못하겠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결국에는 뛰잖아. 그런 거야. 한 순간만 용기를 내면 돼.
대체로 사람들은 삶의 숙제를 혼자 해결하거나, 아니면 일종의 같이 '팀플'할 사람을 구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는 삶의 반려를 들이고자 하는 측이라. 자식을 하나 가졌다. 영원히 나와 떨어지지 않을 혈연으로 묶인 길고 긴 나의 반려자. 유토에게 의지하고 유토를 사랑한다. 아아. 이 소중한 아이를 지킬 수 없다면 죽어버리자. 이 아이가 죽는다면 나도 죽어버려야지. 행복한 순간에도 몇 번을 맹세했다. 아마도 그것은 예언이었던 것 같다.
유토는 희귀병에 걸렸다. 나는 그 병명이 어쩐지 영어 단어 사전에나 나올 듯이 낯설고 우스워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실바텐트 증후군. 유토는 1년 남짓의 시한부다. 정확히 언제 심장이 멈춰 버릴지 모른다. 길고 긴 연명치료를 도전해 볼 수는 있다고 했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이었고, 혼자서 유토를 키우는 내가 그 비용을 다 감당치 못하리란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아마 나는 파산하고, 하루에 세 가지 알바를 병행하면서, 언젠가는 유토를 사랑하고 원망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맹세를 지킬 때가 왔다. 이 아이를 지킬 수 없다면 죽어버리자. 이 아이가 죽는다면 나도 따라 죽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머리가 명쾌해졌다. 노후 자금을 생각하느라 돈 나올 구석을 골몰하고 괴로워할 날이 약 60년 가량은 줄어든 것이다. 남은 것은 담백하고 밀도 있게 쌓아올려진, 완성된 삶. 내가 엔딩 지점을 편집할 수 있는 전지적 감독의 삶. 인생의 끝까지 신경쓸 만큼 본인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가진 태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우선 나는 유토와 나의 장례식 비용을 계산했다. 대신 장례를 치뤄줄 인력을 고용해야 했으니 그 인건비도 함께 더했다. 죽기 전엔 호화로운 버킷 리스트도 이루어보고 -어딘지 정하진 않았지만- 여행도 가보아야 했으므로 죽기 전까지 모아야 할 금액은 내 생각보다 꽤 컸다. 몇년 치 예산 정도는 된다. 그래도 이 몇년 치 예산이, 이 예산만으로, 내 삶을 내가 정한 지점까지 완벽하게 다 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 나는 수험 때보다도 떨렸다.
우선 유토의 병은 점진적으로 상태가 나빠지는 병이다. 이왕이면 유토가 가장 상태가 좋을 때 여러 여행을 다니고 싶었으나, 싱글맘이 대출을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사채만큼은 손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은 다음에 주변 사람이 힘들어진다면 책임감 있는 삶이 아니니까. 우선 급료의 대부분은 우리의 생활비로 나간다. 얼마 안 되는 돈을 저축하고 있었는데, 목표 금액을 모으려면 조금 더 벌어야 한다. 당분간은 주말도 일하고, 새벽도 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전혀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쩐지 수학 여행과 소풍을 기다리는 이처럼, 유리병이나 저금통에 잔돈을 꽉 채워 모으고 나면 목표했던 거대한 물건을 살 날만 기다리는 초등학생처럼, 삶의 끝이 희망차게만 느껴졌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개 힘든 일들 안 해도 돼.
남에게 계획을 말하는 일은 신중해야 했다. 사회 통념 상 질타를 받을 생각이란 건 알았기 때문이다. 다들 희망을 가져보라느니 어쩌느니 하며 나를 우울증에 걸린 환자 취급하겠지. 그렇다고 본인들이 유토의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살아 있으면, 살아 있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 텐데 왜 그런 결단을 내렸니, 같은 말들은 도움이 안 되었다. 댁들은 브로콜리를 싫어하지. 아마 당신들 중 반절은 싫어할 거야. 그런데 레스토랑에 가면 말이야, 컨베이어 벨트에서 계속 음식이 나와. 테트리스의 새 조각이 등장하는 것처럼. 다음 음식이 뭐가 나올지, 음식이 언제 멈출 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어. 살아 있으면 나와 유토가 좋아하는 크로크무슈도 나오고 체리 파이, 메론 소다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먹기 위해 이 식당에서 얼마나 더 오래 앉아 버텨야 하는 지를 모른다. 컨베이어 벨트에는 당연히 브로콜리도 오른다. 식사란 좋아하는 것만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양파를 편식하는 유토에게 내가 간신히 구연 동화, 양파의 열연을 펼쳐가며 먹인 것처럼. 그럼 나는 단 한 조각의 크로크무슈를 위해서 천 백 십일개의 브로콜리를 먹어야 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삶이란 게 그렇게 느껴졌다. 천 개가 넘는 브로콜리를 씹어 삼켜야 하는 일.
그러니까 나는 정한 거다. 오백 개까지는 먹겠어. 마지막 식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하고, 그 뒤에는 식당을 나서자. 유토는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니. 그렇게 물었더니 아들이 우물대며 대답했다.
"치료하면 놀러 다닐 수 없는 거지."
"응. 지금처럼 다니는 건 어려울 것 같아."
"……."
"하지만 아파도 마찬가지일 거야. 몸이 안 좋으면 어디에도 가기 귀찮고 힘겨워질 테니까."
"……."
"유토는 어떻게 하고 싶어?"
"치료하는 거랑 치료하지 않는 거랑 차이가 뭐야?"
"치료하면 유토는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어. 대부분은 침대에 누워 있을 거고, 맘대로 먹거나 맘대로 놀 수 없겠지. 하지만 노력하면 일 년에 네 번은 놀이동산에 갈 거야. 치료하지 않으면 유토는 일찍 죽겠지. 그래도 일 년에 오십 번 넘에 놀이동산에 갈 수 있어. 대신 아주아주 아프겠지만."
그는 고민했다.
이윽고….
"치료하지 않을래."
"그러면 죽게 돼, 유토."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이어 대답했다.
"맘대로 살고 싶어."
아아.
가슴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 없었다.
그 애는 명백한 나의 아들.
양파 천 개 먹기를 거부하는.
someday
09-02
글로리
보고 싶어 케일런
우리는 언제나 피하기만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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